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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작아지는 구두

김덕원 / 수필가, 목사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6-05-28 09:07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기고/수필
신발은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앞이 뾰족하거나 빨간색이면 여자가 주인이고, 다소 어둡고 앞이 넓으면 남자가 주인이 된다. 투박하고 목이 길면 군사용이거나 건축현장에서 각광을 받는 반면, 가볍고 단순하면 사무실에서 인기가 있다. 편안하게 고안이 되었다면 기능성 신발이겠지만, 다소 불편해도 화려하다면 보여주기 위한 패션쇼에 맞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옛날에는 신발로 신분을 구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귀한 분에게는 온갖 보석으로 장식해 위엄을 보여 주었을 것이고, 평민에게는 그저 최소한의 보호막으로 사용 될 짚신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검정 고무신이 유일한 신발이었다. 발에 땀이 나거나 뛰어야 하는 상황이면 어김없이 벗겨져 버리는 신발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고무신 앞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작은 돌멩이를 얹어 발사하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오래된 고무신은 신축성이 떨어져 멀리 나갈 수가 없었지만, 새 신발은 그 속도와 거리가 훨씬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새 신발을 갖기 원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남자 아이들에게는 반나절은 족히 놀아도 될 만큼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 했을 때에도 고무신이 여전한 인기를 누렸다. 어울려 다니며 논두렁에서 미꾸라지를 잡을 때도 고무신을 사용했고, 들판에서 곤충이나 벌레들을 잡을 때도 가장 훌륭한 도구로 사용했다. 구슬치기로 따 모은 구슬을 두 신발 속에 가득 채우면 마치 세상의 모든 재물을 다 손에 넣은 것처럼 행복한 곳간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야외에서 활동이 왕성했던 아이들에게는 냇가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산과 들에서도 그저 한두 번만 털어서 다시 신으면 그만이었던 최고의 신발이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신발은 장난감이나 편리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교복에 어울리는 검은 운동화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암묵적인 신호와 같았다. 사춘기가 시작되니 멋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주말이 되면 빨아 말리고, 끈을 가지런히 매는 일이 귀찮기는 했지만, 그때 처음으로 선물 받은 파란 운동화 때문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검은색으로 통일했어야만 하는 학교 규율을 깨는 것도 짜릿한 느낌이었지만, 친구들과 달리 독특하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모자를 삐뚤게 쓰고, 어떤 친구들은 교복 단추를 잠그지 않는 등, 방법은 달랐지만, 저마다 규율을 깨고 싶은 충동은 하나였다. 그게 사춘기라는 것을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이 학년이 되었을 때, 교복 자율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양복점으로 달려가 파란색 바지와 하늘색 실크 와이셔츠를 맞췄다. 그리고 눈 여겨 놓았던 아버지의 구두 하나를 얻었다. 물론 교복이 자율화 되었어도 신발은 여전히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규칙 때문에 하루 종일 사물함에 보관되어야 했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구두는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 시절, 구두는 나를 설레게 했다.

구두는 멋진 양복과 짝을 이루면서, 한 사람의 정체성과 직업을 나타내 주기도 하고, 권위와 위엄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성공과 재물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시대가 바뀌면서 요즘엔 멋과 교양을 상징하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그 때 그 시절 나에겐, 청소년기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했고, 자유로 향하는 출구였다.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창이었고,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위해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수단이었다. 어쩌면 막막하기만 했던 미래, 그래도 꿈과 비전을 가지고 도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바로 구두였을 것이다.   

2012년 봄, 캐나다 이민생활 십삼 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는 구두 한 켤레를 내 놓으시며 “점점 헐거워져서 더 이상 신을 수가 없구나……”라고 하셨다. 얼추 보아도 내게는 작아 보였지만, 어떤 방법이 있겠지 생각하며 가지고 왔는데, 벌써 사 년째 장식품처럼 신발장에만 놓여 있다. 일 년에 한두 차례 신발장을 정리할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발을 넣어보지만, 점점 더 작아져만 간다.  

아버지는 평생을 하얀 와이셔츠와 양복, 그리고 구두를 신으셨다. 목회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구두를 신고 나갈 때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격려하고, 마음으로 고통을 분담하며, 신앙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의식개혁운동에 헌신하셨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재건활동이 한창이던 육십 년대 중반부터 이천 년대 중반까지 쉬지 않고 일관되게 그 길을 달려 오셨다. 그런데 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 그 많은 세월 동안 아버지와 함께 했던 것이 바로 구두였다.

꿈과 비전을 위해, 사명을 위해, 때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벗을 수 없었던 구두, 작으면 작은 데로 늘려 신고, 크면 큰 데로 엉성하게라도 신어야만 했던 것은 해야 할 일이 있고, 돌봐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젠 맞지 않는 구두를 억지로 신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도 사라졌고, 꼭 돌봐야만 했던 아이들도 장성해 둥지를 떠났으니, 어깨 위에 얹혀 있던 멍에를 내려놓기 위해 남은 구두 한 켤레마저 내 놓으시는 것이다.

처음부터 나에겐 작은 구두였지만, 그 구두를 받지 않을 수도, 그렇다고 억지로 늘려 신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은 이제 아버지를 대신해 멍에를 메어야 하는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겐 항상 태산이었고, 지금까지도 가장 넓은 바다이건만, 그 아버지의 구두가 이렇게 작아졌다는 것을 나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 언젠가 나에게도 맞게 될 그 구두를 오늘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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